‘로봇 지팡이’도 우수제품 될 수 있다…고령친화제품 제도, 품목 규제에서 기능 평가로 전환

보건복지부가 고령친화우수제품 지정 제도를 손질한다. 핵심은 단순하다. 정부가 미리 정해둔 36개 품목 안에 들어와야만 ‘우수제품’ 심사를 받을 수 있던 구조를 바꿔, 앞으로는 고령자의 일상생활을 어떤 기능으로 돕는지에 따라 AI, 사물인터넷, 로봇 기반 제품도 제도권에 진입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초고령사회에 들어선 한국에서 고령친화산업 정책이 보행보조차와 목욕의자 중심의 전통 복지용구 체계에서 디지털 돌봄·자립지원 기술을 포함하는 시장 규칙으로 확장되는 전환점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보건복지부는 23일 ‘고령친화우수제품 지정대상 품목’ 고시 전부개정안을 행정예고하고, 7월 13일까지 의견을 받는다고 밝혔다. 개정안은 현행 품목 열거 방식을 자세지원, 이동지원, 안전지원, 청결지원, 배설지원, 식사지원, 인지·정서지원 등 7개 기능·목적 분야로 재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기존에는 이동변기, 목욕의자, 지팡이, 보행보조차처럼 고시된 품목에 해당해야 심사 대상이 됐지만, 앞으로는 정해진 명칭의 제품이 아니더라도 고령자의 생활 기능을 보완하거나 돌봄 부담을 줄이는 목적이 분명하면 심사 문턱을 넘을 수 있게 된다.
이번 개정은 산업 현장의 변화 속도를 제도가 따라가지 못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 고령친화산업지원센터가 안내하는 현행 고령친화우수제품 제도는 안전성, 견고성, 사용 편의성 등을 심사해 검증된 제품에 S마크를 부여하고, 국가기관·지자체·공공기관의 우선구매가 가능하도록 하는 제도다. 현재 센터의 제품 검색 서비스에는 이동욕조, 목욕의자, 보행보조차 등 복지용구 성격의 제품들이 주로 올라와 있으며, 검색 결과 기준 500여 개 제품이 등록돼 있다.
문제는 시장이 이미 그 다음 단계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낙상 위험을 감지하는 센서형 매트, 복약 여부를 알려주는 AI 스피커, 보행 패턴을 분석하는 스마트 보행기, 치매 고령자의 배회를 감지하는 위치 기반 기기, 정서적 고립을 완화하는 대화형 로봇 등은 기존 36개 품목명만으로는 포괄하기 어렵다. 제품의 형태는 빠르게 융합되고 있는데, 제도는 ‘이 제품이 목록에 있는가’를 먼저 묻는 구조였던 셈이다.
개정안이 기능·목적 중심으로 바뀌면 심사의 질문도 달라진다. 앞으로 중요한 것은 “이 제품이 목욕의자인가, 보행보조차인가”가 아니라 “이 제품이 고령자의 이동, 안전, 인지, 식사, 배설, 청결, 자세 유지에 실제로 어떤 도움을 주는가”가 된다. 이는 단순한 행정 분류 변경이 아니라 고령친화제품의 평가 기준을 물건의 이름에서 사용자의 생활 문제로 옮기는 변화다.
이 변화가 중요한 이유는 인구구조 때문이다. 2025년 기준 한국의 65세 이상 인구는 전체의 20.3%로, 통계상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통계당국은 고령인구 비중이 2036년 30%, 2050년 40%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한다. 고령자 돌봄 수요가 빠르게 늘어나는 상황에서 모든 문제를 요양보호사와 가족 돌봄만으로 해결하기는 어렵다. 일상생활을 보조하는 제품과 기술이 돌봄 인력 부족, 가족 부담, 장기요양 재정 압박을 완화하는 보조축이 될 수밖에 없다.
국제적으로도 보조기기와 고령친화기술의 중요성은 커지고 있다. 세계보건기구는 현재 전 세계에서 25억 명 이상이 하나 이상의 보조기기를 필요로 하며, 고령화와 비감염성 질환 증가로 2050년에는 수요가 35억 명 규모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한다. OECD 역시 고령화로 장기요양 수요가 늘면서 각국이 돌봄의 질과 재정 지속가능성을 동시에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한국의 제도 개편은 이런 흐름과 맞물린다. 그동안 고령친화우수제품은 노인장기요양보험 복지용구와 연결될 때 시장 파급력이 컸다. 복지용구는 장기요양 수급자가 일상생활이나 신체활동 지원을 위해 구입·대여할 수 있는 급여 영역으로, 장기요양보험 체계 안에서 재가급여의 한 축을 이룬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노인장기요양보험이 고령 또는 노인성 질병으로 혼자 일상생활이 어려운 사람에게 신체활동·가사지원 등을 제공하는 제도라고 설명하며, 복지용구 구입·대여도 재가급여 항목에 포함하고 있다.
복지부가 이번 보도자료에서 “노인장기요양보험 복지용구와의 연계 강화”를 언급한 것도 이 대목에서 의미가 크다. 혁신 제품이 우수제품으로 지정되는 것만으로는 시장 확산에 한계가 있다. 고령자와 가족이 실제로 사용하려면 가격 부담이 낮아져야 하고, 장기요양기관·복지용구 사업소·지자체가 신뢰할 수 있는 구매 기준이 있어야 한다. 우수제품 지정이 장기요양 급여 진입이나 공공구매, 지자체 지원사업과 연결될수록 제품 개발 기업에는 시장 예측 가능성이 생기고, 이용자에게는 선택지가 넓어진다.
다만 개방형 구조가 곧바로 혁신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심사 체계의 정교함이 더 중요해진다. 기존 품목 중심 제도에서는 제품군이 비교적 명확해 안전기준과 사용성 평가를 표준화하기 쉬웠다. 반면 AI·로봇·IoT 제품은 데이터 수집, 알고리즘 판단, 네트워크 연결, 배터리 안전, 개인정보 보호, 오작동 책임 등 새로운 쟁점을 동반한다. 예컨대 낙상 감지기가 실제 낙상을 놓치거나, 로봇형 이동보조기가 사용자의 의도와 다르게 움직이거나, 인지지원 기기가 민감한 건강·생활 데이터를 과도하게 수집한다면 ‘편리한 제품’이 아니라 새로운 위험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이번 개정의 성패는 ‘진입 완화’와 ‘안전 검증’의 균형에 달려 있다. AI 기반 고령친화제품을 폭넓게 받아들이되, 고령자 사용 환경에 맞는 안전성, 조작성, 유지관리, 사후서비스, 데이터 보호 기준을 함께 마련해야 한다. 특히 고령자는 디지털 기기에 익숙하지 않거나 시력·청력·근력·인지기능이 저하된 경우가 많다. 제품이 아무리 기술적으로 우수해도 사용 설명이 어렵고 조작이 복잡하면 실제 생활에서는 외면받을 수 있다. 고령친화제품의 품질은 기술 수준보다 ‘혼자서도 안전하게 쓸 수 있는가’에서 갈린다.
기업 입장에서는 규제 예측 가능성이 커지는 효과가 있다. 복지부는 이번 개정안에 고령친화산업지원센터의 신청·접수·지정 업무 수행 근거와 우수제품 신청, 심사, 이의신청, 재심사 절차를 명확히 담겠다고 밝혔다. 이는 특히 신기술 스타트업에 중요하다. 제품을 개발해도 제도상 어느 품목에 넣어야 할지 불분명하면 인증과 급여, 공공조달 전략을 세우기 어렵다. 기능 중심 분류가 안착하면 기업은 제품 개발 초기부터 ‘이 제품이 어느 생활 기능을 개선하는지’를 기준으로 성능자료와 사용성 평가를 준비할 수 있다.
산업적으로는 ‘에이지테크’ 시장의 제도적 출입문이 넓어지는 셈이다. 고령친화산업은 단순 실버용품 시장이 아니라 의료기기, 재활기기, 디지털 헬스, 주거 안전, 돌봄 로봇, 스마트홈, 영양·식사지원, 인지훈련 서비스가 결합하는 복합 산업으로 바뀌고 있다. 세계지식재산기구도 고령자를 위한 보조기술, 이른바 에이지테크가 고령화 시대의 중요한 혁신 영역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그렇다고 이번 개정이 모든 혁신 제품에 ‘고속도로’를 깔아주는 것은 아니다. 우수제품 지정은 어디까지나 품질과 사용성을 검증하는 공적 표시다. 의료기기에 해당하는 제품은 별도의 의료기기 규제를 받아야 하고, 개인정보를 처리하는 제품은 개인정보보호 법령을 지켜야 한다. 돌봄 로봇처럼 물리적 접촉이 있는 제품은 안전사고 책임 기준도 분명해야 한다. 기능 중심 분류가 기술 융합 제품의 진입 장벽을 낮추더라도, 소비자 보호와 책임 소재를 흐리게 해서는 안 된다.
이번 제도 개편이 독보적인 의미를 갖는 지점은 ‘고령자 정책’과 ‘산업 정책’의 접점을 다시 설계한다는 데 있다. 과거의 고령친화제품 정책은 이미 필요한 복지용구를 선별해 보급하는 성격이 강했다. 앞으로는 고령자가 집에서 더 오래, 더 안전하게 생활하도록 돕는 기술을 발굴하고, 검증하고, 시장과 장기요양 체계로 연결하는 플랫폼 역할이 커질 가능성이 높다. 이는 시설 중심 돌봄에서 지역사회 계속 거주, 즉 ‘살던 곳에서 나이 들기’를 지원하는 정책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남은 과제는 세 가지다. 첫째, 7개 기능 분야별로 어떤 성능과 안전 기준을 적용할지 구체화해야 한다. 둘째, AI·로봇 제품에 대한 사용성 평가는 실제 고령자와 돌봄 제공자가 참여하는 방식으로 강화해야 한다. 셋째, 우수제품 지정 이후 장기요양보험, 지자체 구매, 공공 돌봄사업과 어떻게 연결할지 로드맵을 제시해야 한다.
이번 개정안은 고령친화제품 시장에 던지는 신호가 분명하다. 정부가 더 이상 ‘목록에 있는 제품’만 기다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고령자의 생활 문제를 실제로 줄이는 기술이다. AI 스피커든 돌봄 로봇이든 스마트 보행기든, 핵심은 고령자가 덜 넘어지고, 덜 고립되고, 더 오래 스스로 생활할 수 있게 만드는가에 있다. 고령친화우수제품 제도의 개편은 바로 그 질문을 제도 한복판으로 끌어들이는 작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