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병원, 글로벌 감염병 임상시험 본격 참여…팬데믹 대응 ‘치료 근거’ 쌓는다

국내 의료기관이 미국과 아시아권 감염병 임상시험 네트워크에 참여하며 신종감염병과 항생제 내성균 대응 역량을 강화한다. 팬데믹이 다시 발생했을 때 국내 병원이 다국가 임상연구에 신속히 참여하고, 치료제와 치료전략의 효과를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취지다.
질병관리청 국립보건연구원은 국립감염병연구소가 미국 국립보건원(NIH), 싱가포르 국립대학교와 협력해 국내 의료기관의 국제 감염병 임상시험 참여 기반을 구축했다고 11일 밝혔다. 이번 협력은 코로나19와 같은 급성 중증 호흡기 감염병뿐 아니라, 카바페넴내성장내세균목감염증(CRE) 등 항생제 내성균 감염증에 대한 치료전략 마련을 목표로 한다.
국립감염병연구소는 2023년 미국 NIH가 지원하는 ‘STRIVE’ 네트워크 참여를 시작으로 글로벌 감염병 임상연구 협력에 들어갔다. STRIVE는 코로나19 등 급성 중증 호흡기 감염증 치료제 개발을 위한 글로벌 임상시험 플랫폼이다. 이후 2024년에는 싱가포르 국립대학교가 운영하는 아시아 감염병 임상시험 네트워크와 협력체계를 마련해 국내 의료기관의 국제 공동연구 참여 범위를 넓혔다.
싱가포르 국립대학교가 주관하는 ‘RAPID’ 임상시험에는 국내 4개 의료기관이 참여하고 있다. 분당서울대학교병원, 고려대학교 안산병원, 순천향대학교 천안병원, 칠곡경북대학교병원이 지난해 10월부터 환자 등록을 진행 중이다. 이 연구는 CRE와 다제내성 녹농균 감염증 환자를 대상으로 내성 유전자를 조기에 확인하고, 세프타지딤-아비박탐 등 항생제를 신속히 투여했을 때 치료 효과가 개선되는지를 평가하는 다국가 임상시험이다.
항생제 내성균은 기존 항생제가 잘 듣지 않아 치료가 어렵고, 중증 환자나 면역저하 환자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 특히 CRE는 의료기관 내 감염관리와 중환자 치료에서 중요한 위협으로 꼽힌다. 조기 진단과 적절한 항생제 선택이 치료 결과를 좌우하는 만큼, RAPID 임상시험은 실제 환자 치료 현장에서 어떤 전략이 효과적인지 확인하는 데 의미가 있다.
미국 NIH가 지원하는 STRIVE 임상연구 프로그램은 전 세계 34개국에서 운영되고 있다. 국내 의료기관은 이미 코로나19 관련 임상시험 2건에 참여한 바 있으며, 현재는 중증급성호흡기 감염을 앓는 면역저하 환자를 대상으로 전향적 관찰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면역저하 환자는 감염병에 취약하고 치료 반응도 일반 환자와 다를 수 있어, 별도의 임상 근거 축적이 중요하다.
국립감염병연구소는 국내 의료기관이 이런 국제 임상시험에 안정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감염병 전문병원을 중심으로 의료기관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국내외 연구기관 간 협력체계 운영과 연구 수행을 지원하고 있다. 단순히 개별 병원의 연구 참여에 그치지 않고, 국가 차원의 임상시험 대응 인프라를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번 기반 구축의 의미는 감염병 위기 때 더욱 커질 수 있다. 신종감염병이 발생하면 치료제 후보의 효과와 안전성을 빠르게 확인해야 하지만, 한 나라의 환자 수와 연구 역량만으로는 충분한 근거를 만들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다국가 임상시험 네트워크에 참여하면 여러 국가의 환자 자료를 함께 분석해 더 빠르고 신뢰도 높은 치료 근거를 확보할 수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감염병 대응에서 임상시험 속도와 국제협력의 중요성을 보여줬다. 감염병 확산 초기에는 어떤 치료제가 효과적인지 불확실한 상황에서 의료진이 환자를 돌봐야 한다. 이때 국제 임상시험 체계가 이미 마련돼 있으면, 국내 의료기관도 신속히 연구에 참여해 치료전략 수립에 필요한 데이터를 생산할 수 있다.
국립감염병연구소의 이번 협력은 신종감염병뿐 아니라 항생제 내성 문제에도 대응하는 기반이 된다. 항생제 내성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공중보건 위협이며, 국가별 의료환경과 내성균 유행 양상이 다르기 때문에 국제 비교와 공동연구가 필요하다. 국내 의료기관이 RAPID와 같은 다국가 임상시험에 참여하면 한국 환자 자료를 국제 연구 안에 반영하고, 국내 진료지침 개선에도 활용할 수 있다.
임승관 질병관리청장은 국제 임상시험 네트워크 참여 기반 구축이 미래 감염병 위기에 대비하기 위한 중요한 기반이라고 밝혔다. 그는 앞으로도 국제 연구기관과 협력을 확대하고, 국내 의료기관의 글로벌 임상연구 참여를 지원해 감염병 대응 역량을 지속적으로 강화하겠다고 설명했다.
이번 사업은 감염병 대응의 무게중심이 진단과 방역을 넘어 치료 근거 생산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백신과 진단기술, 방역체계만으로는 팬데믹 대응이 완성될 수 없다. 실제 환자를 치료하는 현장에서 어떤 약제와 전략이 효과적인지를 빠르게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 국내 병원이 글로벌 임상시험 네트워크 안에서 역할을 넓히는 것은 다음 감염병 위기에 대비한 중요한 안전망이 될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