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의 예약도 진료도 앱에서…영국 NHS가 ‘온라인 병원’을 만드는 이유
영국에서 병원을 이용하는 방식이 크게 달라질 준비를 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동네 주치의인 GP를 거쳐 전문의 진료가 필요한 경우 특정 병원으로 의뢰받고, 정해진 병원에서 대면 진료를 기다리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영국 국민보건서비스 NHS는 2027년부터 이 과정의 상당 부분을 온라인으로 옮기는 새로운 체계인 ‘NHS Online’을 가동할 계획이다.
NHS Online은 단순한 화상진료 서비스가 아니다. 물리적인 병원 건물 없이 전국의 전문의를 디지털로 연결하고, 환자는 NHS 앱을 통해 전문의 상담과 검사 예약, 처방, 치료 과정 관리를 이어가는 방식이다. 필요하면 가까운 지역의 진단센터에서 검사나 시술을 받을 수도 있다.
NHS는 이 서비스를 통해 환자가 특정 병원에 묶이지 않고 전국의 전문의에게 더 빨리 연결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동시에 대면 진료가 꼭 필요한 환자에게 기존 병원 자원을 더 집중하겠다는 계산도 깔려 있다.
GP를 만난 뒤 선택지가 하나 더 생긴다
영국 의료체계에서 대부분의 전문의 진료는 GP를 거쳐 시작된다.
환자가 동네 GP를 방문해 진료를 받고 전문의 평가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병원으로 의뢰된다. NHS Online이 시행되면 이 단계에서 새로운 선택지가 생긴다.
환자는 기존처럼 지역 병원에서 대면 진료를 기다릴 수도 있고, 자신의 상태가 온라인 진료에 적합하다면 NHS Online을 선택할 수 있다. 이후 NHS 앱에서 예약을 관리하고 전국 다른 지역에 있는 전문의를 온라인으로 만나는 구조다.
온라인 상담으로 끝나지 않는 경우도 고려돼 있다.
혈액검사나 영상검사, 시술이 필요하면 환자는 집이나 직장에서 가까운 지역의 Community Diagnostic Centre 같은 시설을 앱에서 예약해 이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고 있다. 전문의는 온라인에 있고 검사는 가까운 지역에서 받는 방식으로 진료 경로를 나누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전문의가 있는 병원까지 직접 가야 한다’는 기존 구조가 일부 바뀔 수 있다.
NHS가 온라인 병원을 만드는 가장 큰 이유는 긴 대기시간
영국 의료에서 가장 오래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진료 대기시간이다.
특히 전문의 외래와 선택수술 분야에서는 환자가 수개월 동안 기다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NHS는 이런 대기 문제를 줄이기 위해 병상과 인력만 늘리는 방식이 아니라, 전국에 흩어진 전문의의 시간을 하나의 디지털 체계로 묶는 방식을 선택하고 있다.
예를 들어 특정 지역에서는 한 전문분야의 대기가 길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을 수 있다. 기존에는 환자가 지역 병원 중심으로 의뢰됐기 때문에 이런 여유 인력을 다른 지역 환자가 활용하기 어려웠다.
NHS Online은 이 경계를 낮추려 한다.
환자가 어느 지역에 살든 온라인 진료가 가능한 상태라면 전국의 전문의와 연결할 수 있기 때문에, 의료인력의 지역별 불균형을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다는 기대다.
NHS는 NHS Online이 첫 3년 동안 최대 850만건의 진료와 평가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온라인 병원에는 건물이 없다
‘온라인 병원’이라는 이름 때문에 기존 병원의 디지털 버전을 떠올리기 쉽지만 구조는 조금 다르다.
NHS Online은 하나의 큰 건물을 새로 짓는 방식이 아니다.
전국 곳곳에서 일하는 전문의와 기존 NHS 시설, 지역 진단센터를 디지털로 연결해 하나의 병원처럼 운영하는 네트워크형 조직에 가깝다.
2026년 6월에는 이 서비스를 실제로 운영할 Online NHS Trust가 공식 출범했다. 일반 NHS 병원처럼 하나의 의료조직이지만, 중심 역할은 환자와 전국의 전문의, 지역 검사시설을 온라인으로 연결하는 데 있다.
이는 병원을 공간보다 기능으로 보는 접근이다.
전문의는 다른 지역에 있어도 되고, 환자가 받는 검사는 집 근처에서 할 수 있으며, 진료 기록과 처방은 NHS 앱을 통해 이어지는 구조다.
처방전도 앱으로 받고 약은 동네 약국에서
온라인 진료 뒤 약이 필요한 경우에는 디지털 처방전을 이용할 수 있다.
환자는 온라인으로 전문의 상담을 받은 뒤 처방을 받고, 해당 처방을 가까운 약국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되면 전문의가 있는 병원과 약을 받는 장소도 분리된다.
지금까지 환자는 전문의 진료와 검사, 처방을 하나의 병원 중심으로 경험했다면 앞으로는 전문의는 온라인에서 만나고, 검사는 지역센터에서 받고, 약은 동네 약국에서 찾는 구조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NHS가 강조하는 ‘디지털 기본값’ 전략도 이런 방향을 전제로 한다.
NHS는 2026년 4월부터 각 의료기관이 기존 NHS 앱 기능을 적극 활용하도록 하고, 적절한 사전 분류를 거친 예약의 최소 95%를 앱에서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목표를 제시했다. 환자가 예약과 의뢰, 약 관리, 대기시간 확인까지 하나의 앱에서 관리하도록 만들겠다는 것이다.
AI는 의사를 대신하기보다 ‘어디로 갈지’를 먼저 판단한다
NHS의 디지털 전환에서 AI도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다만 AI가 전문의 대신 진단을 내린다는 의미는 아니다.
NHS가 계획하는 ‘My NHS GP’ 체계에서는 AI 보조 분류 모델을 활용해 환자가 어떤 서비스를 먼저 이용해야 하는지 안내하는 방향이 제시돼 있다. 증상이 단순한 경우에는 자가관리 정보를 제공하고, GP 진료가 필요하면 예약으로 연결하며, 전문적인 평가가 필요하면 적절한 진료경로로 보내는 식이다.
현재 의료 이용에서 환자가 가장 어려워하는 문제 가운데 하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판단하는 것이다.
응급실로 가야 하는지, GP를 만나면 되는지, 전문의를 찾아야 하는지를 환자 스스로 판단해야 할 때가 많다.
NHS는 이 첫 단계를 앱과 디지털 분류체계가 도와주도록 하겠다는 구상이다.
모든 질환을 온라인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NHS Online이 시작된다고 해서 전문의 진료 전체가 온라인으로 옮겨가는 것은 아니다.
신체 진찰이 중요하거나 즉각적인 검사가 필요한 질환, 수술과 처치가 필요한 환자는 기존 병원을 이용해야 한다.
NHS 역시 온라인 진료는 환자와 질환에 적합한 경우에만 제공한다고 명확히 하고 있다. GP나 1차 의료진이 전문의 진료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뒤 NHS Online이 적절한 선택지라고 판단될 때 환자에게 제안하는 구조다.
환자에게 선택권도 남는다.
온라인 진료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기존처럼 대면 진료를 받을 수 있으며, NHS는 디지털 진료가 유일한 선택지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NHS Online은 기존 병원을 없애는 프로젝트보다, 온라인으로 처리할 수 있는 진료를 분리해 기존 병원의 부담을 줄이는 방식에 가깝다.
전문의의 ‘근무 방식’도 달라질 수 있다
온라인 병원은 환자뿐 아니라 의료진의 근무 방식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기존에는 전문의가 자신이 소속된 병원 환자를 중심으로 진료했다면, 온라인 시스템에서는 지역 경계를 넘어 다른 지역 환자를 진료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NHS가 전국의 전문인력을 한 시스템으로 연결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정 지역에서 전문의가 부족하더라도 다른 지역의 의료진이 온라인으로 진료에 참여할 수 있다면 지역별 의료격차를 줄일 여지가 생긴다.
반대로 이런 방식이 확대되면 의료진의 업무량 관리와 온라인 진료의 질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가 새로운 과제가 된다.
온라인으로 더 많은 환자를 볼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의료진에게 진료량을 지나치게 늘리면 오히려 진료의 질이 떨어질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앱을 잘 쓰지 못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나
디지털 의료가 확대될수록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디지털 격차다.
스마트폰과 앱 사용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예약과 처방, 검사 결과를 한곳에서 관리하는 방식이 편리할 수 있지만 고령층이나 장애인, 디지털 기기 사용이 어려운 사람에게는 오히려 의료 접근성이 떨어질 수 있다.
인터넷 연결이 불안정하거나 영어 사용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같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NHS가 온라인 진료를 선택사항으로 두는 이유 가운데 하나도 이런 격차를 고려하기 때문이다.
NHS Online은 기존 대면 진료를 없애는 방식이 아니라 온라인을 이용할 수 있고 원하는 환자에게 추가 선택지를 제공하도록 설계되고 있다.
결국 온라인 의료의 성공 여부는 기술을 얼마나 많이 도입하느냐뿐 아니라, 디지털 방식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을 기존 의료체계가 얼마나 잘 보호하느냐에도 달려 있다.
NHS가 노리는 것은 진료 편의보다 시스템 비용 절감까지 포함한다
온라인 병원을 만드는 이유는 환자 편의만이 아니다.
영국 NHS는 의료비와 인력 부족이라는 구조적인 문제를 동시에 안고 있다.
NHS의 중기계획은 디지털 진료를 통해 환자를 처음부터 적절한 서비스로 보내고, 불필요한 진료 과정을 줄이며, 의료기관이 가진 자원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제시하고 있다.
환자가 병원을 여러 번 방문해야 하는 과정을 줄이고, 단순 상담은 온라인으로 처리하며, 검사와 처치가 필요한 환자만 실제 시설을 이용하도록 하면 같은 의료인력으로 더 많은 환자를 볼 수 있다는 계산이다.
이미 NHS는 데이터 플랫폼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일부 급성기 병원에서 병원당 월평균 선택수술이 114건 증가하고 퇴원이 늦어지는 일수가 35% 줄었다고 밝히고 있다. NHS는 이런 디지털 기반 효율화 경험을 전체 의료체계로 확대하려 한다.
앱 하나에 의료가 몰릴수록 개인정보 문제도 커진다
진료 예약과 처방, 건강정보, 전문의 상담까지 NHS 앱으로 모이면 편리해지는 만큼 개인 의료정보의 중요성도 커진다.
NHS는 NHS Online이 기존 NHS 로그인과 국가 의료정보 시스템을 이용하고, 환자 진료에 필요한 의료진만 관련 정보를 볼 수 있도록 설계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온라인으로 이뤄진 진료정보 역시 기존 방식처럼 환자의 GP에게 공유된다.
하지만 서비스 규모가 커질수록 보안사고나 시스템 장애가 발생했을 때 영향도 커진다.
특히 전국 의료체계를 하나의 앱과 디지털 네트워크로 묶는 구조에서는 편리함과 동시에 시스템 안정성과 개인정보 보호가 핵심 의료안전 문제로 바뀔 수 있다.
영국의 실험은 ‘비대면 진료’보다 더 큰 변화다
한국에서 온라인 의료라고 하면 흔히 전화나 영상으로 의사와 상담하는 비대면 진료를 먼저 떠올린다.
영국 NHS가 준비하는 변화는 그보다 범위가 넓다.
전문의 상담만 온라인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GP 의뢰와 예약, 전문의 진료, 검사 예약, 처방과 사후관리까지 하나의 디지털 경로 안에서 연결하려 하기 때문이다.
2027년부터 시작될 NHS Online은 전국의 전문의와 지역 의료시설을 하나의 온라인 병원처럼 묶는 것이 핵심이다. 첫 3년 동안 최대 850만건의 진료와 평가를 제공한다는 목표도 세워졌다.
성공한다면 환자는 전문의가 있는 병원까지 직접 이동하지 않고도 상당 부분의 진료를 받을 수 있고, NHS는 지역별 의료인력 차이를 전국 단위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진료의 질과 디지털 소외, 개인정보 보호, 온라인으로 볼 수 있는 질환의 한계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새로운 불편과 격차가 생길 수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