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등 8개 도시 ‘적색경보’…이탈리아가 폭염에 의료재난

글로벌 헬스/국제동향

-27개 도시 건강위험 감시체계 가동…연속된 고온·열대야가 고령층과 심혈관·호흡기 환자 위협

이탈리아가 폭염을 단순한 기상현상이 아니라 보건의료 위기로 관리하고 있다. 8월 28일을 전후해 로마와 바리, 팔레르모, 카타니아 등 8개 도시에 최고 수준의 폭염 건강경보인 적색경보가 내려졌고, 주황색 단계까지 포함하면 중부와 남부의 상당수 주요 도시가 건강위험권에 들어갔다. 이탈리아는 기온만 보는 일반적인 폭염주의보와 달리, 고온이 실제 인체에 어느 정도 부담을 주는지를 반영하는 도시별 건강경보 시스템을 27개 도시에서 운영하고 있다. (ansa.it)

이 체계가 주목받는 이유는 폭염의 위험을 ‘오늘 몇 도까지 오르느냐’가 아니라 ‘누가 얼마나 오래 고온에 노출되느냐’로 보기 때문이다. 특히 고령자와 영유아, 임신부, 심혈관질환자, 호흡기질환자, 당뇨병 환자처럼 체온 조절과 수분 균형이 취약한 사람에게는 며칠간 이어지는 고온과 열대야가 훨씬 더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이탈리아 의료계도 연속적인 폭염이 단발성 고온보다 건강에 더 위험하다고 경고하고 있다. (ansa.it)


왜 ‘하루 최고기온’보다 연속된 더위가 더 위험할까

인체는 더위에 노출되면 땀을 흘리고 피부혈관을 확장해 체온을 낮춘다. 건강한 성인이라면 어느 정도의 고온에는 적응할 수 있지만, 밤까지 기온이 떨어지지 않으면 몸이 회복할 시간이 줄어든다.

특히 열대야가 이어지면 수면의 질이 떨어지고 심박수와 체온이 높은 상태가 오래 지속될 수 있다. 낮에는 고온에 노출되고 밤에도 충분히 식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면 체온 조절 부담이 누적된다.

이탈리아 전문가들이 최근 강조한 것도 이 ‘지속성’이다. 며칠간 이어지는 폭염에서는 탈수와 전해질 불균형뿐 아니라 기존 심혈관질환과 호흡기질환이 악화될 가능성이 커지고, 고령층에서는 신장기능 저하와 의식변화, 낙상 위험까지 증가할 수 있다. (ansa.it)

결국 폭염은 높은 온도 자체보다 그 온도가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지가 더 중요한 건강 변수일 수 있다.


고령층이 특히 위험한 이유

이탈리아는 유럽에서도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된 국가 가운데 하나다. 폭염 건강경보가 단순 기상정보가 아니라 의료정책의 일부로 운영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고령자는 갈증을 느끼는 능력이 떨어질 수 있고, 체온 조절 반응도 젊은 사람보다 둔해질 수 있다. 이 때문에 충분한 수분을 섭취하지 못한 상태로 더위에 노출되면 탈수와 저혈압이 빠르게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

또 고혈압이나 심부전, 부정맥, 만성폐쇄성폐질환 같은 만성질환을 이미 앓고 있는 경우가 많아 고온 스트레스가 기존 질환을 악화시킬 수 있다. 이뇨제나 혈압약 등 일부 약물은 탈수나 전해질 변화에 영향을 줄 수 있어 더운 날씨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심혈관질환자에게 폭염이 위험한 이유는 체온을 낮추기 위해 심장이 더 많은 혈액을 피부 쪽으로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심장 기능이 약한 사람은 이런 추가 부담을 견디기 어려울 수 있다.

호흡기질환자도 마찬가지다. 고온과 대기오염, 오존 농도 상승이 겹치면 호흡곤란이 더 심해질 수 있다.


이탈리아의 적색경보는 단순 ‘외출 자제’가 아니다

이탈리아의 폭염 건강경보 시스템은 기온에 따라 단순히 색깔을 나누는 방식이 아니다. 도시별 기상조건과 인구 특성, 과거 건강피해 데이터를 함께 고려해 인체에 미치는 위험 수준을 평가한다.

적색경보는 건강한 사람에게도 위험할 수 있는 수준을 의미하고, 특히 고위험군에서는 건강피해 가능성이 크게 높아진 단계로 본다. 주황색 단계는 주로 취약계층에 상당한 위험이 있는 수준으로 관리된다.

이런 시스템의 장점은 보건당국과 의료기관이 사전에 대비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응급실과 지역의료기관은 폭염 기간 동안 탈수와 열사병, 심혈관·호흡기질환 악화 환자가 늘어날 가능성을 예상할 수 있고, 지방정부는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연락망과 돌봄 서비스를 강화할 수 있다.

폭염경보가 단순한 생활정보가 아니라 의료수요 예측 도구로도 활용되는 셈이다.


열사병보다 더 흔한 문제는 ‘기존 질환의 악화’일 수 있다

폭염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이야기할 때 흔히 열사병만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실제로는 기존 질환의 악화가 더 큰 문제일 수 있다.

심부전이 있는 환자는 고온으로 인한 탈수와 혈압 변화 때문에 증상이 나빠질 수 있고, 만성신장질환자는 수분과 전해질 균형이 깨지면서 신장기능이 더 떨어질 수 있다. 당뇨병 환자 역시 탈수가 심해지면 혈당 조절이 어려워질 수 있다.

또 고령층은 더위로 식욕이 떨어지고 수면이 깨지면서 전반적인 신체기능이 저하될 수 있다. 이런 변화가 며칠 이상 이어지면 낙상과 혼란, 입원 가능성도 커질 수 있다.

이 때문에 폭염의 건강피해는 응급실에서 열사병 환자 몇 명이 발생했는지를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심근경색과 뇌졸중, 호흡기 악화, 신장기능 저하 같은 질환이 평소보다 얼마나 늘었는지를 함께 봐야 한다.


도시가 더 위험한 이유, ‘열섬효과’

폭염 건강경보가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도시는 콘크리트와 아스팔트가 열을 흡수하고 밤에도 천천히 방출하기 때문에 주변 농촌지역보다 기온이 더 높게 유지되는 열섬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건물이 밀집하고 바람길이 막힌 지역은 야간에도 체감온도가 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에어컨 사용이 어려운 저소득층이나 혼자 사는 고령자, 야외 노동자처럼 사회경제적 취약성이 겹치면 같은 도시 안에서도 폭염 피해가 특정 집단에 집중될 수 있다.

글로벌헬스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폭염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위험하지 않다.

기후위기는 자연현상이지만 건강피해는 주거환경과 소득, 연령, 만성질환, 의료접근성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폭염대책은 기상예보만으로 끝날 수 없고 사회복지와 지역보건, 의료체계를 함께 움직여야 한다.


병원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지역사회 관리

폭염이 심해질 때 모든 고위험군이 병원으로 몰리면 의료체계도 부담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이탈리아와 유럽 여러 국가에서는 폭염 기간 동안 지역보건과 사회돌봄을 함께 강화하는 방식을 활용한다. 혼자 사는 고령자에게 전화로 상태를 확인하고, 냉방이 가능한 공간을 안내하거나, 약물 복용과 수분 섭취를 점검하는 방식이다.

이런 접근은 단순해 보이지만 중요하다. 고령층이 탈수와 어지럼증을 겪은 뒤 응급실에 실려 오는 것보다 그 전에 물을 마시고 시원한 공간으로 이동하도록 돕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폭염 건강경보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경보를 내리는 데서 끝나지 않고 취약계층에게 실제 행동으로 연결돼야 한다.


기후변화가 의료정책을 바꾸고 있다

폭염은 이제 일시적인 계절 문제가 아니라 반복되는 보건위기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남유럽은 여름철 고온이 장기간 이어지는 경우가 늘면서 보건의료체계도 기후변화를 전제로 다시 설계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병원은 폭염 시기 응급실 수요 증가에 대비해야 하고, 지역의료는 고위험 만성질환자를 사전에 관리해야 한다. 요양시설과 복지시설은 냉방과 수분 공급 체계를 갖춰야 하고, 지방정부는 폭염에 취약한 주거지역을 파악해야 한다.

이런 변화는 결국 보건의료가 병원 안에서 치료하는 역할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앞으로 기후위기가 심화될수록 의료정책은 질병이 생긴 뒤 치료하는 방식에서 기상과 환경 데이터를 이용해 건강위험을 미리 예측하고 예방하는 방식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크다.


이탈리아의 적색경보가 다른 나라에도 던지는 질문

이탈리아의 폭염 건강경보 시스템은 단순히 더운 나라의 특수한 정책으로 보기 어렵다.

한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에서도 여름철 폭염이 길어지고 고령인구가 늘면서 비슷한 문제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후변화 시대의 폭염 대응은 “물을 자주 마시라”는 생활수칙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어느 지역에 고령자가 많이 살고 있는지, 심혈관·호흡기질환자가 어디에 집중돼 있는지, 폭염 기간 의료수요가 얼마나 늘어날지를 미리 파악해야 한다.

또 에어컨을 사용할 수 없는 취약계층과 야외 노동자, 독거노인처럼 스스로 위험을 피하기 어려운 사람에게는 공공의 개입이 필요하다.

이탈리아가 27개 도시에서 건강위험을 감시하고 적색·주황색 단계에 따라 대응을 달리하는 것은 폭염을 기상재난이 아니라 의료재난으로 본다는 의미다.

앞으로 폭염으로 인한 건강피해를 줄이는 경쟁력은 단순히 더 정확한 일기예보를 만드는 데 있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기상정보를 의료와 복지, 지역사회 돌봄으로 얼마나 빠르게 연결하느냐가 더 중요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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